종가 정보

전통문화의 어제와 오늘을 이어가면서 내일을 준비하는 종가

종가 정보

  • 연안이씨 월사종가
  • 월사 이정귀李廷龜, 1564년(명종 19)~1635년(인조 13)
    • 지역가평군
    • 제례일4월

지리적·생태적
특징

경기도 양주시와 강원도 춘천시 사이에 있는 가평은 한때 행정구역이 강원도에 속하다가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소양강 줄기는 가평의 남쪽을 관통하여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다. 가평의 북부지역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농토가 적다. 대부분 계곡 옆 임야를 이용하여 19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하전을 했다. 지금은 그 일대에 잣나무가 무성하여 전국에서 가장 많은 잣이 생산되고 있다. 가평읍 주변과 남쪽으로는 평지가 있어 벼농사를 짓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오곡, 조, 팥, 참깨, 뽕나무, 삼 등이 생산되었고 공물은 꿀, 지초 등이 있었다. 주 생산물로는 잣, 송이, 느타리, 산개, 신감초, 밤 등이 있었다. 잠실이 현에서 22리 떨어진 조종현 남쪽에 있었으며 뽕나무 2만여 주를 심고 부근 각 고을의 각 관청 노비 50여 명을 사역시켜 잠사에 종사하게 했다. 역은 두 곳이 있어 교통이 편리했다. 가평현의 화악산華岳山은 예조에서 산천제를 지내던 곳이다. 이정귀의 사당과 묘가 있는 가평군 상면 태봉리는 과거 종택이 있었으며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벼농사와 밭농사를 지었다. 지금도 몇 가구가 남아있으나 대부분은 외지로 떠났다.

불천위 인물

이석형李石亨의 현손이며 부친은 현령을 지낸 이계李啓이다. 종로구 서울대병원 뒤쪽 박석고개 입구에 그의 집터가 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출산을 앞두고 산고를 시작하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대문을 지키고 있다가 아이가 출생하자 크게 포효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큰 인물이 났다고 상서롭게 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의 기질을 보여 6세에 이미 한시를 지었다고 한다.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인 그의 재주는 이미 초년기부터 나타났다. 14세 때 승보시에 장원한 뒤, 22세에 진사,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나자 임금의 교서를 적는 가주서假主書가 되었으며 세자를 가르치는 직책을 맡기도 했다. 그는 한어를 잘하여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 조선을 대표하여 그들을 응대했다. 1598년(선조 31) 조선이 왜병과 함께 중국을 침범할 것이라는 명나라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지어 명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여러 차례 대제학에 올라 문사에 능한 자들을 발굴했고, 중국을 내왕하면서 100여 장의 『조천기행록』을 펴냈다. 그 뒤 병조판서, 예조판서, 좌의정, 우의정을 지냈다. 이정귀는 15세에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을 찾아갔으며 안동권씨 권극지의 딸과 혼인 후 수몽守夢 정엽鄭曄과 글을 읽었다. 이정귀의 가문은 대대로 문장에 능했으니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로부터 문정공文靖公 이명한李明漢, 문숙공 이일상에 이르기까지 3대를 이어 대제학이 되었다. 이정귀는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었고, 윤근수는 김덕수金德秀, 이황李滉의 문인이었다. 유몽인柳夢寅, 황신黃愼과 세자 광해군이 함께한 서연書筵은 정책 수립에도 기여했다. 홍익한은 월사의 문인이었다. 월사의 문인이었던 최유해崔有海는 『월사집』을 편찬했다. 이정귀는 문학을 경세치용의 도구로 보았으며, 그의 문장은 당시 관인문학을 선도하는 전범을 보였다. 시문집으로 『월사집』 68권 22책이 전한다. 1745년(영조 21) 불천주不遷主가 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내림 음식

제의 장소

  • 1. 사당전경
    1. 사당전경
  • 2. 사당
    2. 사당
  • 3. 비각과 정려문
    3. 비각과 정려문
  • 4. 월사집장판각
    4. 월사집장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