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 정보

전통문화의 어제와 오늘을 이어가면서 내일을 준비하는 종가

종가 정보

  • 광주이씨 광원군종가
  • 사봉 이극돈李克墩, 1435년(세종 17)~1503년(연산군 9)
    • 지역수원시
    • 제례일2월

지리적·생태적
특징

수원은 우시장이 유명했으며 지금도 수원 갈비는 향토음식으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광원군종가에서도 수원갈비를 제물로 올린다. 광원군종가와 사당이 있는 수원시 파장동芭長洞은 광교산 기슭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때 광주부 일용면이었다가 1789년 수원부로 속하게 되었다. 1789년(정조 13)에 팔달산 동쪽 기슭으로 수원부의 읍치를 옮기고 1796년 화성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팔달산 주변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었는데 당시 파동은 파장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미륵동, 일림동, 파장동을 통합시켜 ‘파장리’라 하여 일형면에 소속시켰다. 그러다가 1931년 수원면을 읍으로 승격시키고, 1936년 10월 1일을 기해 일형면과 의왕면이 통합하여 일왕면이 될 때, 파장리는 일왕면에 소속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파장동은 북수원 IC에서 나와 지지대고개를 지나 경수산업도로를 따라 북문 방향으로 2km 정도 가다 보면 우측에 있다. 과거에는 광교산의 산줄기가 휘감고 있는 조용한 농촌이었으나 개발이 되면서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다. 파장동은 200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벼, 보리, 콩, 수수, 감, 대추, 밤, 녹두 등을 재배하고 수확물로 메, 두부, 녹두전, 과일 등 갖은 제물을 차리고 직접 기른 닭에서 계란을 산출하여 간납肝納을 만들던 곳이다.

불천위 인물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가계는 부친 이당李唐 때까지 광주부의 향리역에 종사하던 한미한 가문이었으나 둔촌 자신을 포함한 형제 5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관직에 나아감으로써 명문가가 되었다. 향리 가문에서 중앙 관료로 진출하는 것은 고려 후기의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지배층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향리층 공통의 사회적 욕구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려 후기에 전래한 이념지향적인 성리학을 익힌 이들의 학문과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려는 것은 유학자들의 보편적인 목표이기도 했다. 둔촌의 5형제와 아들 3형제, 손자 8형제가 모두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둔촌의 후손들은 여말선초 특수한 정치상황에서 신왕조의 정권에 참여하여 왕성한 관직생활을 통해 명문 사환가仕宦家로 발전했다. 이극돈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이집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이지직李之直,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1457년(세조 3) 친시 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갔다. 1470년(성종 1)에 대사헌으로 국정전반에 개혁과 민생안정에 노력하여 형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좌리공신 4등으로 1472년 광원군廣原君으로 봉해졌다. 1485년(성종 16) 서거정 등과 『동국통감』을 편찬했다. 성종의 국상 때 빈전도감제조, 산릉간심사가 되고, 1495년(연산군 1) 우찬성으로서 지관사가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했다. 그는 전례에 밝고 사장에 능한 훈구파의 거물로서 행정과 옛일을 잘 알고 사려가 깊어 이르는 곳마다 업적이 있어 추앙되었다. 하지만 1498년(연산군 4)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청당상관으로서 사초를 정리하다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의 사초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훈구파의 비위 사실이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서,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조의제문>이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라고 하여 무오사화의 빌미를 일부 제공했다. 이극돈은 어세겸魚世謙 등과 사관으로서 김일손의 사초를 즉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화 뒤 잠시 파직되었다가 다시 광원군에 봉해졌다. 1501년(연산군 7)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1503년에 69세의 나이로 졸했다. 명종 14년에 부조지전을 받았다. 이극돈은 문장가요, 청렴강직하고 행정과 외교에 능한 인물로 가는 곳마다 업적이 있었다. 학문적인 측면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부친의 친구인 김숙자金叔滋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숙자는 길재의 학문을 이어받아 아들 종직에게 잇게 했다. 이극돈의 학통은 족손인 탄수 이연경으로 이어졌다. 이극돈은 사림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으나 사림의 모함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극돈은 사화로 인해 아들을 잃고 또한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서간문, 문서 등 많은 자료를 소실했다.

내림 음식

제의 장소

  • 1. 부조묘
    1. 부조묘
  • 2. 재실
    2. 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