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 정보

전통문화의 어제와 오늘을 이어가면서 내일을 준비하는 종가

종가 정보

  • 진주강씨 문경공종가
  • 강맹경姜孟卿, 1410년(태종 10)~1461년(세조 7)
    • 지역이천시
    • 제례일4월

지리적·생태적
특징

이천의 북쪽과 서쪽은 광주산맥과 차령산맥 등 높은 산이 있고 동쪽과 남쪽은 낮은 산지가 발달했다. 산지 사이로 복하천이 흘러 기름진 평야를 이루어 농업이 발달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땅이 넓고 기름지며, 백성은 많고 부유하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역이 두 곳 있었으며 교통도 편리하여 양녕대군의 사저와 행궁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땅이 많이 메마르고 간전이 많았으나 후에는 호수와 저수지로 인하여 농업용수도 풍부하여 주요 농산물인 쌀과 무와 배추 등의 밭작물 외에 사과, 포도 등의 과실이 생산되었다. 문경공의 부조묘가 있는 나래2리는 진주강씨 집성촌이며 가톨릭 신자가 많은 마을로 가톨릭 공회가 있으나 주민들은 유교식 제례를 열심히 모시고 있다. 마을에 논이 많아 주민들은 벼농사를 주로 하며 사과 과수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외 고추, 마늘 등을 재배하고 있다.

불천위 인물

강맹경의 조부는 동북면순무사 강회백姜淮伯, 부친은 지창녕현사 강우덕姜友德이며 어머니는 지보주사 이혜李蕙의 딸이다. 강맹경은 중시조로부터 9세손이 되며 1410년(세종 10)에 태어났다. 1426년(세종 8) 16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1429년(세종 11)에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451년(문종 1)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이조참판으로서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왔다.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선양받도록 하는 일에 협력한 공으로 좌익공신 2등에 책정되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좌참찬을 거쳐 1457년(세조 3) 우의정 때 등극사登極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8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강맹경은 학문이 깊었으며 황희黃喜의 밑에서 촉망을 받았다. 황희가 정승으로 있을 때 강맹경은 그를 보좌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강맹경에게 황희가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강맹경은 이자李稵의 수서시를 지었으며, 이자의 5대손인 구암龜巖 이정李楨은 강맹경의 수서시에 차운하여 지어진 시들을 모아 목판본으로 간행했으며, 이정의 『구암집』에는 강맹경의 수서시 후에 이은 시가 거의 백여 편이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32권 웅천현 부분에 ‘만리풍도제포변萬里風濤薺浦邊’이라는 강맹경의 시가 소개되어 있다. “오경五更 북소리는 웅성熊城 위이고 만 리 풍도風濤는 제포 가로다. 지금의 왕화王化를 알고자 하여 두어 곡조 어가漁歌 들으며 누선樓船에 기대었네” 세조가 강희맹과 신숙주申叔舟에게 내린 시가 있으며, 신숙주는 강희맹의 비명을 지었다. 신숙주가 쓴 비명을 보면 강맹경은 의절과 법도에 밝아 빈례나 제례 등 큰 의식에서 찬이나 빈을 시켰는데 격식에 어긋나지 않았다 한다. 1461년(세조 7)에 졸했는데 유언으로 상례는 모두 가례를 따르고 검약하게 하라 했다.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에 묘소가 있다. 묘역은 1994년 경기도 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었으며 문경공파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강맹경 묘지 바로 아래에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아들 강윤범의 묘가 있다. 묘역에는 봉분 앞에 묘비, 상석,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이 있으며 무인석 우측 뒤에 신도비가 있는데 1462년(세조 8) 신숙주가 글을 짓고 강희안이 글씨를 썼다. 강맹경의 졸기卒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영의정 강맹경姜孟卿이 졸卒했다. 임금이 매우 슬퍼해서 소선素膳을 듣고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공신 등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가서 곡哭하게 했다. 쌀과 콩 아울러 70석과 종이 1백 권을 내려 주었다. 강맹경은 성품이 관후寬厚하고 활달하며 풍채가 훌륭했다. 젊어서 과거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의정부의 사인舍人이 되고, 문종조文宗朝에 미치어서는 판내자시사判內資寺事로 전직轉職되었다가 승정원의 동부승지로 발탁되고, 여러 번 도승지에 올랐었는데 병 때문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바꾸었다. 세조가 임금의 계통을 잇게 되자 좌익 공신佐翼功臣에 참여하여 더욱 알아줌을 받아서 드디어 영의정에 올랐다. 힘써 대체大體를 따르고 대신大臣다운 위엄이 있어서 매양 담론談論하고 주대奏對할 때마다 말이 급히 흐르는 물과 같이 거침없이 유창하다. 정인지鄭麟趾가 일찍이 면대面對하여 말하기를, “경卿은 정사에 재주가 있으나, 다만 박학博學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했다. “시호諡號를 문경文景이라 내려 주었는데, 충성하고 신의가 있으며 예문禮文에 의거한 것이 문文이요, 의義로 말미암아 구원한 것이 경景이다.”라고 했다.

내림 음식

제의 장소

  • 1. 부조묘
    1. 부조묘
  • 2. 부조묘
    2. 부조묘
  • 3. 부조묘
    3. 부조묘
  • 4. 부조묘 현판
    4. 부조묘 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