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 정보

전통문화의 어제와 오늘을 이어가면서 내일을 준비하는 종가

종가 정보

  • 연안김씨 의민공종가
  • 김제남金悌男, 1562년(명종 17)~1613년(광해군 5)
    • 지역원주시
    • 제례일6월

지리적·생태적
특징

원주는 강원도 남서부에 위치하며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이었는데 신라 문무왕 때 북원소경北原小京으로 칭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원주로 개칭했고 1018년에 군으로 바뀌어 영월군과 제천군을 속군으로 평창현, 단산현, 영춘현, 주천현, 황려현을 속현으로 거느린 큰 군이 되었다. 1308년(충렬왕 34)에 원주목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며 강원도의 관찰사영이 위치한 행정중심지였다. 1395년 지방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강릉의 '강'자와 원주의 '원'자를 합하여 강원도라 했고 원주에 강원감영이 설치되어 행정, 치안, 사회, 문화 등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쪽에 치악산이 있으며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큰 강으로 섬강이 흐른다. 땅이 메말라서 논보다 밭이 많다. 조선시대에는 생산물로 오곡, 뽕나무, 삼, 배, 닥나무, 칠漆 등이며, 공물로는 꿀, 황밀, 잣, 지초, 시우쇠, 느타리, 붉나무충영, 사슴포, 여우가죽, 살쾡이가죽, 노루가죽, 수달피, 표범꼬리였다. 의민공의 사당은 인조반정 후 인목대비의 각별한 관심 속에서 지어졌는데 그 후 후손들이 일가를 이루며 거주하고 있다. 주민들은 지금도 벼농사와 밭농사를 하고 있다.

불천위 인물

선조의 장인이며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다. 자는 공언恭彦,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그는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4년(선조 27) 의금부도사, 공조좌랑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을 지냈다. 1597년(선조 3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601년(선조 34) 정언, 헌납, 지평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이조좌랑 때인 1602년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고 후에 인목왕후仁穆王后가 되었다. 따라서 김제남은 영돈녕부사가 되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으로 봉해졌다. 김제남의 딸인 인목왕후와 선조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을 중심으로 소북당이 형성되고 광해군을 중심으로 대북당이 형성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인목왕후 소생인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서소문 밖 자택에서 아들 셋과 함께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1616년(광해군 8)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며느리 정씨鄭氏는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가 인조반정 후 돌아왔으며 손자 천석天錫은 한동안 숨어 살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에 관작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서산에 안장되었다가 강원도 원주군 지정면 안창리로 이장했다. 인조는 특명을 내려 묘소 입구 좌측에 김제남의 사당 의민사와 그의 신도비를 세우도록 했다. 사당은 그 후 두 차례 소실되었고 현재의 사우는 1964년에 재건했다. 인조반정 후 인목대비는 길지를 찾아 사당을 짓도록 하여 경기도 일대에서부터 명당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 원주에 터를 정했다고 한다. 또한 인목대비는 의민공의 제사에 쓰는 제물도 왕궁에서 하는 격식에 맞추도록 하여 의민공 후손들은 그것에 입각하여 제수를 준비했다고 한다.

내림 음식

제의 장소

  • 1. 사당과 종택 전경
    1. 사당과 종택 전경
  • 2. 종택
    2. 종택
  • 3. 사당 전경
    3. 사당 전경
  • 4. 의민사
    4. 의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