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적·생태적
특징
문양공이 1471년 12월 23일 별세하여 1472년 12월 17일 장례를 했는데 맏아들인 공도공은 묘 아래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로 인해 그곳에 종가를 짓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당시 사대부가에서는 서울에 경저가 있고 시골에 향저가 있었다. 시묘살이를 했다고 하여 이곳의 지명은 ‘시묘동’으로 불린다. 문양공 종택이 세거한 시묘동(관산1동)은 1990년대 주공아파트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청주한씨가 60여 가구 거주했으나 2021년 근래에는 30여 가구가 거주한다. 종택은 옛터에 그대로 있다. 시묘동은 청주한씨 종택이 있는 ‘건너마을’ 외에도 ‘샛마을’, ‘넘엇마을’, ‘안산마을’, ‘벌마을’이라는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는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에 속하며 영조 31년(1755) 고양군수 이석희가 쓴 『고양군읍지』에 사리대면 관산리 시묘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벽제면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문양공의 묘소는 마을 뒷산 장령산 아래에 있으며 북한산에서 발원한 공릉천이 마을 앞을 지나며 임진강과 닿아있다. 이 강줄기를 따라 경지가 분포되어 있으며 토양이 비옥하여 곡창지대를 이룬다. 개발 전에는 마을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가지고 제물을 차렸는데 이곳에서는 벼농사와 고추, 녹두 등 밭작물을 재배했다. 과거에는 임진강 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와서 배를 타고 다닐 수 있었으며 몇 십 년 전에는 참개가 기어 다녔다. 장령산에서는 청주한씨가 주관하고 지역민이 함께 참여하는 산신제가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