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계는 정진후의 7대손으로 문하평리 월성군月城君 정휘鄭暉의 아들이며 첫 부인은 고려말 명재상 염제신의 딸 곡성염씨이며 염씨 사후 계배는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딸이다. 그는 1348년에 태어났다. 공민왕이 그를 보고 근시近侍로 뽑았으며 이후 벼슬이 대호군에 이르렀으며 1397년(공민왕 9) 밀직상의로 재직할 때 김화金化 평강으로 왜구가 침입하여 남좌시南佐時, 안소安紹와 출전했으나 패했다. 1384년(우왕 10) 판밀직사사를 거쳐 최영의 아래에서 서북면도순문사로 있었으며 최영 사후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자 판자혜부사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이성계를 해하려 했다는 이초李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안변에 유배되었으나 다음 해 풀려났다. 공양왕 4년 이성계의 도움으로 판개성부사를 거쳐 문하평리와 응양위상호군을 겸했다. 그해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참찬문하부사, 팔위상장군에 올라 계림군에 봉해졌으며 노비 20구와 전지 170결을 하사받았다. 1결이 6,813평이니 약 1,150,000평 정도 된다. 이때 사패지로 받은 땅은 서울시 양천구 신정동 일대로 지금도 상당한 토지를 사단법인 경주정씨양경공파종약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후 판팔위사, 좌참찬을 거쳐 판한성부사로 있다가 1396년(태조 5) 등창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자손들은 일등 공신의 후손이라고 하여 죄를 지어도 사면이 되는 혜택도 부여받았다. 조선이 개국 되던 초기 세 정씨鄭氏가 삼한三韓을 멸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정희계鄭熙啓가 그들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는 말이 있다. 사후 양경良景으로 시호가 내려졌다.
세종실록 60권, 세종 15년 6월 8일 기록에 보면, 승정원에 정희계의 두 번째 부인인 영산 신씨靈山辛氏가 공주에게 준 노비 문권을 희계 자손에게 돌려주도록 명했다는 기사가 있다.“죽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희계의 아내 신辛씨는 연창군 공주延昌君公主의 이웃에서 살았으며, 이로 인하여 공주가 연이어 은혜를 베풀었는데, 신씨가 깊이 감사하여 노비 30명의 문권文券을 만들어 공주에게 주었다. 일시적인 은혜로 공공연하게 받는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한 것이니 희계의 자손을 불러서 문권을 주고 돌려보내라.”고 했다.
정희계의 묘역은 서울시 양천구 신정동 매봉산과 지양산 자락에 있다. 양경공파종약원이 1966년에 설립되어 1983년에 양경공의 고조, 증조, 조부, 부친 4위의 단소를 묘역 좌측 자락에 설치했다. 이들의 묘는 개성에 있는데 분단으로 인해 실묘되었다. 1985년과 2016년에는 묘역 정화사업을 했다. 이곳에는 14기의 묘와 28위 선조를 안장했다. 매년 음력 10월 2일에 후손들이 모여 선조 4위를 시작으로 정희계 이하 선조들의 제를 지낸다. 사당은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송정리 종택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