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시姜蓍의 증손이며 조부는 동북면 도순문사 강회백姜淮伯, 부친은 지돈녕부사 강석덕姜碩德이다. 모친은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며 세종은 이모부가 된다. 형은 인순부윤을 지냈던 강희안姜希顔이다. 문량공은 어려서 숙부 감찰공 강순덕姜順德에 입양되었으나 형 강희안이 후사 없이 죽어 임금의 윤허를 받아 파양하여 생부를 계승했다. 강희맹은 12살에 당대 이름이 높았던 김예몽金禮夢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441년(세종 23)에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하고 24세가 되던 1447년(세종 29)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예조좌랑, 돈녕판관을 거쳐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되었으며 1455년(세조 1)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1463년 중추원부사로서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예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쳐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南怡가 죽임을 당하고 예종이 논공하여 처음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이듬해 익대공신 3등에 책봉,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해지고, 1471년(성종 2)에는 좌리공신 3등에 책봉되었다. 그 해 지춘추관사로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세조실록』, 『예종실록』을 편찬했다. 병조판서, 판중추부사, 이조판서, 판돈녕부사, 우찬성을 역임하고 1482년(성종 13) 좌찬성에 이르렀다. 1482년 2월 17일 60세가 되던 해 작고했으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강희맹은 『신찬국조보감』, 『경국대전』, 『사서삼경 언해』,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국조오례의』, 『국조오례의서례』 편찬에 참여했으며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했던 문장가였으며 서화에도 능했다.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일본에 있는 독조도獨釣圖는 강희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원각사비의 액전額篆, 부친 강석덕姜碩德 묘표의 액서額書, 합천홍류동체필암각陜川紅流洞泚筆巖刻 등에 그의 글씨가 남아있다. 그는 민요와 설화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의 『농구십사장農謳十四章』은 농요를 모아 정리한 것으로 농민의 애환과 농정의 실상을 묘사했다. 저서로는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 『금양잡록衿陽雜錄』, 『촌담해이村談解頤』 등이 있다.
강희맹이 사신으로 명나라 남경에 다녀오면서 전당홍錢塘紅 연자蓮子와 위성류渭城柳를 가져와 전당홍을 관곡지에 심어 연꽃이 펴지니 안산 고을 이름이 연성蓮城이 되었고 정조가 화성 능행길에 안산에 들려서 강희맹의 전당홍과 연성에 관한 시제로 과거를 보기도 했다. 위성류는 남대문 밖 고택에 심으니 사람들이 위성류댁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서울시 중구 순화동 193번지에 서울시에서 세워놓은 강희맹 집터 표지석이 있다.
강희맹 집터에는 정3품 소나무가 있다. 대부송大夫松으로 불리던 이 소나무 앞을 지날 때면 말에서 내려 당상관을 뵐 때와 같이 예를 갖추고 지나갔다.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군조에는 연산군이 원자로서 3세 되던 해 병이 나서 강희맹의 집으로 피접을 와서 안씨부인이 춥고 따뜻함을 잘 조절하고 젖을 알맞게 먹여 불과 열흘이 못 되어서 건강하게 되자 성종이 옷 두서너 벌과 면포, 소목, 쌀 70섬을 하사했다. 이 집으로 피접하던 중에 원자가 실꾸리를 삼켜 목구멍이 막혀서 위급하게 되었다. 시녀들이 놀라고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부짖기만 하는데 안씨부인이 달려와서 “어찌 실꾸리를 삼킨 아기씨를 반듯이 눕혀 둔 채 더 깊이 들어가게 한단 말이냐.” 하며 즉시 안아서 일으키고 유모를 시켜 양쪽 귀밑으로 껴잡게 하고는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넣어 실꾸리를 뽑아내니 순간 숨이 통하여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인 안씨는 안숭효安崇孝의 딸로 14세에 시집와서 부덕을 지킴에 있어 실수가 없었다. 당시 원자였던 연산군은 이 댁 소나무 밑에서 놀았으므로 왕위에 오른 다음 진시황이 소나무 5그루에 대부의 벼슬을 주었듯이 그 소나무에 벼슬을 주고 금띠를 둘러 그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말에서 내려서 지나가게 했다. 당시에는 피마병문避馬屛門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