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는 지중추부사 성세순成世純, 부친은 당대 명필인 성수침成守琛, 모친은 판관 윤사원尹士元의 따님이다. 17세에 초시에 합격했으나 신병으로 백일걸白仁傑 문하에서 유학에 전념했다. 1573년(선조 6) 공조좌랑을 시작으로 누차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했다. 1581년(선조 14) 종묘서령으로 체임되었으나 낙향은 허락받지 못했다. 그 해 선조에게 학문과 정치, 민정에 대해 고하여 선조는 미곡을 하사했다. 1589년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하여 이조판서에 복귀했다. 임진왜란 때 1594년 비국당상 · 좌참찬으로 있을 무렵 명나라는 명군을 철군시키면서 대왜對倭 강화를 요구했는데 성혼은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화의를 주장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당시 전라도관찰사 이정암李廷馣이 적의 예봉을 피하고 병란을 늦추자는 화의를 주장하는 장계를 올렸는데 이를 옹호하여 삼사의 탄핵일자 관직에서 물러나 파주로 내려갔다. 1598년(선조 31) 64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1602년(선조 35)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 되었다가 1633년(인조 11) 복관사제復官賜祭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81(숙종 7)년 문묘에 배향되었다. 불천지위의 위패를 봉안하여 여산 죽림서원, 창녕 물계서원, 해주 소현서원, 함흥 운전서원 등에서 제향되었다.
학맥을 보면 성혼은 부친 성수침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백인걸白仁傑 문하에서 유학에 전념했으며 초서에 능했다. 1554년(명종 9) 같은 파주 지역에 있던 이이李珥와 친구가 되었으며 송익필과도 교류했다. 1568년(선조 1) 이황李滉을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아 그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을 지지하고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에 이의를 제기했다. 『중용』 서문의 주자의 인심도심人心道心설에 대해 이이와 쟁론을 시작하며 다년간 사단칠정이기설四端七情理氣說에 대한 논쟁을 했다. 그는 파주 우계에서 조헌趙憲 등 각지에서 모인 후진을 양성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저서로는 『우계집牛溪集』,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